
어떤 기록은 먼 길을 돌고 돌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온다. 강원도 평창 오대산에 있던 실록과 의궤가 1913년 바다를 건넜다가 한 세기가 넘어서야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말이다. 2023년 11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 글은 오래도록 집을 떠나 있던 기록들이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과 그 이후에 새로이 시작될 수많은 여행을 담는다.
조선(朝鮮), 기록의 나라
기록은 본래 권력의 도구다. 다만 조선의 기록은 권력자조차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스스로 지울 수 없게 하게끔 했다. 왕의 말과 신하의 반박, 국가의 큰 결정과 그날의 날씨까지. 조선은 많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중심에는 조선 역대 왕의 행적을 연대기순으로 정리해 편찬한 공식 국가기록,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제1대 태조부터 제25대 철종까지 472년이라는 기나긴 역사가 담긴 이 기록물은 조선의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법률, 산업, 예술, 종교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적는 편년체(編年體)로 쓰였고, 그 방대함과 엄정함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사고(史庫), 기록을 지키는 집
실록은 만드는 일만큼이나 ‘어디에 둘 것인가’가 중요한 기록이었고, 사고(史庫)는 그 답이 되어줬다.
국가의 주요 서적, 그중에서도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는 사각(史閣), 실록각(實錄閣)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은 이 기록을 한곳에 몰아두지 않았다. 한양의 춘추관에 하나를 두고, 충주·전주·성주 같은 지방에도 같은 기록을 나누어 보관했다. 어느 한 곳에 불이 나거나 변고가 생겨도 다른 곳의 기록으로 다시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러한 지혜는 임진왜란에서 증명되었다. 전쟁의 길목에 있던 충주·전주·성주·춘추관 사고가 모두 불탔지만, 전주사고의 서적만은 선비와 백성들이 내장산으로 옮겨 지켜냈다. 그 덕에 오늘날 우리가 실록을 읽는다.
오대산, 기록이 돌아온 자리
임진왜란이라는 뼈아픈 경험 끝에 조선 후기의 사고는 아예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1606년 태백산과 오대산에 사고를 새로 지어, 강화·묘향산·춘추관과 함께 다섯 사고 체제를 갖추게 된다. 산속의 기록은 가까운 절의 승려들이 지키는데, 오대산사고는 월정사가 수호사찰이 되었다. 기록을 지키는 일이 수행의 일부가 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오래 제자리에 있지 못했다.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1913년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반출되었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대부분 소실되었다. 화를 면한 27책은 1932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이후 2006년과 2018년에 걸쳐 추가로 반환이 이루어진 끝에 총 75책의 오대산사고본 실록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2023년 11월, 그 돌아온 기록들이 머물 집으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 오대산에 문을 열었다. 다만 이곳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이 운영하던 ‘왕조실록·의궤박물관’을 리모델링한 건물이다. 건물이 기억을 갖는다는 말은 종종 수사로 쓰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문자 그대로다. 유물이 제자리로 돌아왔고, 그 유물을 기다리던 공간도 제 역할을 바꾸어 남았기 때문이다.
75책. 숫자로만 보면 담담하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불에 탄 밤과 백 년의 시간이 있다. 살아남은 기록만이 우리에게 당도했다는 사실은, 남은 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질문을 조용히 건넨다.
환대, 모두에게 열린 경험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을 둘러보는 내내, 나는 자꾸 도서관을 떠올렸다. 유물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관람객을 맞이하는 태도에서였다. 좋은 도서관이 그러하듯, 이곳은 ‘누구든 온다’는 것을 전제로 지어져 있었다.
(1) 어린이박물관의 섬세한 눈높이

전시는 유물을 늘어놓는 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누군가의 이해를 설계하는 일이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의 어린이박물관은 그런 점에서 섬세한 곳이으며, ‘기록’과 ‘실록’이라는 키워드에 관한 경험도 풍성하게 제공하는 곳이었다. 공간의 동선과 높이, 문장의 길이를 따라가다 보니 익숙한 문장이 떠올랐다.
‘모든 이용자에게 그의 자료를’ (“Every Reader His/Her Book”(출처))
인도의 문헌정보학자이자 사서인 랑가나단(S. R. Ranganathan)이 도서관을 위해 만든 다섯 법칙 중 하나이지만, 본질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통하는 법이 아닐까.
(2) 손끝으로 읽는 전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서 눈에 띄는 요소가 있었다면 바로 점자 팸플릿이었다. 박물관 로비 한쪽에 놓인 점자 팸플릿은 주인공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공간이 누구를 상상하며 꾸려졌는지가 드러난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라는 지향점이 이 인쇄물 하나에 실현되어 있었다.
INDEX PLACE, 공간의 크레딧
공간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상상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지었다.
그 이름을 남기는 일도 기록의 영역이다.
- 운영 주체: 국가유산청 (국립고궁박물관 분관)
- 기존 건축물 설계: 여유당건축사사무소(2019)
- 건축 설계, 리모델링 인테리어, 전시 기획, 브랜딩 참여 업체: 도시건축집단 성북동